[1월 9일(율리우스력 1905)] 평화 시위에 발포로 답하다: “피의 일요일 사건”
1905년 1월 9일, 제정러시아 혁명의 도화선 “피의 일요일 사건”
(당시 러시아가 사용하던 율리우스력 기준으로 작성된 게시물입니다. / 그레고리력으로는 1월 22일에 발생했습니다.)
국민을 향한 무차별 발포, 러시아 황실이 자행한 끔찍한 자국민 학살
1905년 1월 9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광장을 향해 성상과 찬송가를 들고 평화롭게 행진하던 수만 명의 민중에게 가해진 무차별 총격은 러시아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 사건은 ‘피의 일요일’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며,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제정러시아의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전제정치가 막을 내리고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기까지, 그 출발점에는 바로 이 ‘피의 일요일’이 있었다. 평화적인 청원에 대한 폭력적인 응답으로 국민들에게 신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황실은 존립할 수 없었고, 끝내 처참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배경 - 폭발 직전의 러시아 제국
● 전제정치의 모순과 사회적 불평등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은 유럽 최대의 영토를 자랑했지만, 내부는 심각하게 병들고 있었다.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전제정치하에서 대다수 국민은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조차 누리지 못했다. 1861년 농노제가 폐지되었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토지 부족과 높은 세금에 시달렸고,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도시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열악한 생활환경에 내몰렸다.
귀족과 소수 특권층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가운데, 노동조합 결성이나 파업은 불법이었고, 이를 시도하는 노동자들은 가혹하게 탄압받았다. 수많은 소수민족들은 러시아화 정책과 종교적 탄압에 시달렸으며, 서구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체제에 대한 비판이 커져 갔다.
● 러일전쟁의 참패와 민심 이반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은 러시아 사회의 불만을 폭발 직전까지 몰아갔다. 일본에 대한 연이은 패배는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식량 부족으로 민중의 삶을 더욱 궁핍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일본인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굶주림과 싸우고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민심은 차르 정부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 러시아 정교회 사제 게오르기 가폰과 노동자 조직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정교회 사제 게오르기 가폰이 등장했다. 처음에는 정부가 지원하는 ‘경찰 사회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공장 및 공장 노동자 협회’를 조직했지만, 점차 노동자들의 실제적인 요구를 대변하며 정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전개 – 생존을 위한 국민들의 행진
● 1904년 12월 28일: 해고 사건과 파업의 시작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형 푸틸로프 공장에서 발생했다. 가폰의 협회 회원 4명이 ‘협회 활동’을 이유로 해고되자, 동료들은 이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항의했다.
● 1905년 1월 3일 ~ 1월 8일: 파업의 확산
1월 3일,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이 해고된 동료들의 복직과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다른 공장들로 빠르게 확산되어 수십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게 되었다.
1월 8일, 가폰 사제는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을 담은 청원서를 작성했다. 이 청원서는 8시간 노동제, 임금 인상, 작업 환경 개선 등의 경제적 요구뿐만 아니라 입헌 의회 소집, 보편적 선거권, 언론 및 집회의 자유, 러일전쟁 종식 등의 정치적 요구까지 포함했다. 청원서는 전통적 가치관과 황실에 대한 당대의 보편적 인식에 따라 황제인 차르를 “아버지”로 칭하며 공손하고 충성스러운 어조로 작성되었으며, 가폰 사제는 수천 명의 탄원자들과 함께 황제에게 “총애와 정의”를 호소할 계획이었고, “우리 아버지 차르가 상황을 알면 반드시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며 굳건한 믿음을 보이며 비폭력을 강조했다.
●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이날 아침, 가폰 사제를 선두로 약 15만 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달하기 위해 겨울궁전으로 향했다. 이들은 종교적 상징물인 이콘과 십자가, 그리고 차르의 초상화를 들고 찬송가를 부르고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며 평화롭게 행진했다. 하지만 당시 니콜라이 2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차르스코예 셀로에 머물고 있었다. 정부는 도시 외곽과 주요 길목에 이미 군대를 배치해 놓았고, 군대는 ‘시위대의 진입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정오 무렵, 행렬이 겨울궁전 광장 근처에 이르자 군대는 어떠한 경고나 해산 명령도 없이 곧바로 발포를 시작했다. 겨울궁전 광장과 그 주변 거리에서 군인들은 평화로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수백 명이었지만, 실제로는 1,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 흘리는 시신들이 눈 위에 나뒹굴었고, 그들의 피 위에 성상과 탄원서가 깨지고 흩어졌으며, 부상자들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결과와 이후 변화
● 즉각적인 파장: 전국적 반정부 운동
‘피의 일요일’ 소식은 즉각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차르를 ‘온화한 아버지’로 믿던 민중의 믿음이 산산조각 나면서 충성심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1월 한 달 동안 44만 명이 파업에 돌입했고, 연내 전국적으로 280만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이는 러시아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였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민, 학생, 군인, 자유주의자, 지식인 등 다양한 계층이 반정부 운동에 동참했다. 6월에는 흑해함대의 전함 포템킨에서 수병 반란이 발생하여 군대 내 불만도 표출되었다.
●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전개
10월, 전국적 총파업이 벌어지자 차르 니콜라이 2세는 ‘10월 선언’을 발표해 입법권을 가진 국회 개설, 헌법 제정, 기본권 보장 등을 약속했다. 12월 모스크바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으나 정부군의 무력 진압으로 1,000명 이상이 사망하며 혁명은 진정 국면에 들어갔다.
● 장기적 영향: 1917년 혁명으로의 연결고리
비록 1905년 혁명은 실패했지만, 이는 1917년 2월과 10월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레닌은 “1905년의 연습이 없었더라면 1917년 10월 혁명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시기 노동자 소비에트(평의회)가 처음 등장했으며, 이는 이후 볼셰비키 혁명의 조직적 기반이 되었고, 러시아 로마노프 황실의 몰락과 소련의 탄생으로 이어져 20세기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민을 외면한 제국의 종말
1905년 1월 9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은 노동자와 민중이 차르에게 평화적으로 청원하던 중 정부군의 무차별 발포로 수백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서 사회 구성원들 간의 평화적 합의를 전혀 도출해 내지 못하고 오직 폭력으로만 대응하는 제정러시아 정부의 무능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피의 일요일’은 국가 권력의 폭력이 민중의 분노를 촉발하고 사회 변혁의 기폭제가 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평화적 요구에 대한 폭력적 응답이 오히려 더 큰 저항과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차르가 가졌던 ‘신의 대리자’라는 권위는 겨울궁전 광장의 총성과 함께 영원히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민중의 의지만 남았다. 이 의지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져 제정러시아의 노마노프 황실은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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