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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일(49 BC)] 로마 제국의 시작: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루비콘강 도강

△삼복△ 2025. 6. 23. 13:18

49BC 1 10,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공화정을 끝내고 절대군주가 되다

 

빈첸초 카무치니, <카이사르의 죽음>(1798)
Vincenzo Camuccini, <La morte di Cesare(The Death of Julius Caesar)>(1798) |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주사위는 던져졌다

갈리아와 이탈리아를 가르는 루비콘강. 이 강을 무장한 채 건너는 것은 당시 로마법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는 한마디를 남끼고 이끌고 강을 건넜다. 이 결단은 500년간 지속된 로마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이후 1500년간 이어질 로마 제국의 문을 열었다.

 

배경 무너져 가는 공화정과 권력의 삼각관계

기원전 1세기 말 로마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포에니 전쟁 이후 급격한 영토 확장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그 과실은 소수 귀족층에게만 집중되었다.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귀족파와 평민을 지지 기반으로 한 민중파 사이의 갈등은 날로 심해졌다. 전통적인 공화정 체제로는 더 이상 거대해진 제국을 통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세 명의 강력한 인물이 등장했다. 뛰어난 군사 지휘관 폼페이우스, 막대한 재력을 가진 크라수스, 그리고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지닌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기원전 60, 이들은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해 로마의 실권을 장악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어 8년간 정복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으로 카이사르는 현재의 프랑스 전 지역을 정복하며 막대한 부와 충성스러운 군단, 그리고 갈리아의 정복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반면 크라수스는 기원전 53년 파르티아 원정에서 전사했고, 폼페이우스는 점차 원로원과 손을 잡으며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삼두정치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원로원은 급격한 카이사르의 권력 확대를 경계했다. 갈리아에서 돌아온 카이사르가 군사력을 바탕으로 로마를 장악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사인(일반인)의 신분으로 로마에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이를 거부하면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겠다며 최후통첩을 날린 것이다.

 

전개 - 결단에서 내전까지

   50 BC - 최후통첩의 전달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 임기가 만료되자, 원로원은 즉시 그에게 군대 해산과 로마 복귀를 명령했다. 카이사르는 자신도 폼페이우스처럼 무장한 채 로마에 입성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에 들어가는 순간 정적들이 그를 법정에 세워 정치 생명을 끝낼 것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49 BC 1 1 - 비상사태 선포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불응에 맞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폼페이우스에게 최고 군사권을 위임하고, 카이사르를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했다. 이제 카이사르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만 남았다. 로마 원로원에 굴복하여 몰락하거나, 무력으로 맞서 내전을 일으키거나.

   49 BC 1 10일 밤 - 운명의 도강

카이사르는 라벤나에서 군단과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경계선인 루비콘강에 도착한 그는 한참을 침묵했다. 강을 건너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결단을 내리고 강을 건넜다. 로마 내전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49 BC 1월 중순 - 파죽지세의 진격

카이사르의 진군은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그는 아리미눔(현재의 리미니)을 점령한 후 빠르게 남하했다. 놀랍게도 많은 도시들이 저항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카이사르의 관대한 정책과 민중 친화적 이미지 덕분이었다.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는 이탈리아 반도를 버리고 그리스로 도피했다.

   49 BC 2-10 - 서부 전선과 로마 장악

카이사르는 동시에 여러 전선에서 작전을 펼쳤다. 마실리아(마르세유)를 공략하고, 히스파니아(스페인)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단을 항복시켰다. 9월에는 로마로 돌아와 독재관에 선출되었다. 불과 10개월 만에 카이사르는 로마 서부를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결과와 이후 변화 - 공화정의 끝, 제정의 시작

   즉각적 결과: 내전의 승리와 절대권력 장악

루비콘 도강 이후 벌어진 내전은 카이사르의 완승으로 끝났다.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카이사르는 이집트, 소아시아, 아프리카까지 원정하며 모든 적대 세력을 제거했다. 그는 종신독재관(dictator perpetuo)이 되어 사실상 절대군주의 지위에 올랐다.

마침내 권력을 독점한 카이사르는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토지를 재분배하고, 시민권을 확대했으며, 달력을 개혁했다. 또한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도시를 재정비했다. 이런 정책들은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전통적 귀족층의 반발을 샀다.

   카이사르의 암살과 공화정 복구 시도의 실패

기원전 44 3 15,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장에서 브루투스를 비롯한 공화주의자들의 칼에 찔려 죽었다. 암살자들은 독재자를 제거함으로써 공화정이 부활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또 다른 내전을 불러왔을 뿐이다.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와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해 암살자들을 제거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최후의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다. 기원전 27, 그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으며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현대 사회에 미친 영향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강은 현대에도 강력한 상징으로 남아있다. ‘루비콘을 건넜다는 표현은 전 세계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을 의미하는 관용구가 되었다. 2023년 러시아의 프리고진 반란, 2016년 한국의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도 이 표현이 자주 사용되었다.

정치학에서는 이 사건을 통해 민주주의와 독재, 법치주의와 현실 권력의 관계를 연구한다. 또한 리더십 연구에서는 결정적 순간의 판단력과 책임감에 대한 교훈을 얻는다. 카이사르의 선택은 권력을 가진 개인의 결단이 어떻게 역사 전체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다.

 

역사의 분기점에 던져진 주사위

기원전 49 1 10일 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것은 단순한 군사적 행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500년간 지속된 로마 공화정을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선언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그의 말처럼, 이는 모든 것을 걸고 내린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이었다. 카이사르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는 실로 엄청났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체제가 바뀐 로마는 이후 1500년간 유럽과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로마법, 라틴어, 기독교 문화가 제국 전역에 퍼져 나갔다.

하지만 이 사건은 동시에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얼마나 취약한지도 보여 준다. 카이사르는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기존 질서를 파괴했지만, 그 결과는 자유로운 공화정의 소멸이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의 유혹은 여전히 존재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루비콘강 도강. 그것은 한 개인의 야심이 어떻게 문명 전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크고 작은 루비콘강앞에 서게 된다. 그때마다 카이사르의 결단을 떠올리며, 선택의 무게와 책임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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