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1991)] 미군 ‘사막의 폭풍’ 작전 개시: 걸프전 발발
1991년 1월 16일, 세계의 화약고 중동에 폭풍이 불다
현대전의 새로운 장
1991년 1월 15일, 국제사회의 최후 통첩의 시한이 만료되었다. 다음 날인 1월 16일 밤, 바그다드 상공에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CNN을 통해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지켜본 이 장면은 단순한 전쟁의 시작이 아니었다. 냉전이 막 끝난 시점에서 ‘세계의 경찰국가’를 표방하는 미국 주도의 새로운 국제 질서를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었고, 첨단 기술이 적용된 현대전의 시발점이었다.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으로 명명된 이 군사행동은 향후 30여 년간 중동 지역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배경 - 석유와 부채가 만든 화약고
걸프전의 뿌리는 1990년 8월 2일 새벽, 이라크군이 쿠웨이트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사담 후세인이 이 무모한 침공을 감행한 배경에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얽혀 있었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8년간 지속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이라크에게 막대한 전비 부담을 안겨 주었다. 전쟁이 끝났지만 국가 재정은 파탄 상태였고, 특히 쿠웨이트를 비롯한 걸프 산유국들에 대한 부채가 심각한 수준에 달했다. 후세인은 쿠웨이트에 부채 탕감과 추가 지원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여기에 석유 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겹쳤다.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OPEC 할당량을 초과해 석유를 생산함으로써 유가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한 쿠웨이트가 이라크 국경 근처 루마일라 유전에서 불법적으로 석유를 시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후세인은 이를 “경제 전쟁”이라고 규정하며 군사적 대응을 정당화했다.
역사적 명분도 동원되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과거 오스만 제국 시절 이라크 영토의 일부였다고 주장하며, 영국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분리된 땅이라고 강변했다.
쿠웨이트 침공은 국제사회에 즉각적인 충격을 주었다. 쿠웨이트는 작은 나라였지만 세계 석유 매장량의 10%를 보유한 핵심적인 산유국이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장악할 경우 중동 석유의 약 20%를 통제하게 되어, 서방의 에너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전개 - 외교에서 전쟁으로
● 1990년 8월~12월: 국제사회의 대응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침공 당일인 8월 2일 즉시 이라크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 660호를 채택했다. 이어 8월 6일에는 이라크에 대한 전면적인 경제 제재를 가하는 결의안 661호가 통과되었다.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신속하게 대응에 나섰다. 8월 7일부터 ‘사막의 방패 작전(Operation Desert Shield)’을 개시하여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라크의 추가 침공을 저지하고 쿠웨이트 해방을 위한 준비 태세를 갖추기 위한 조치였다.
냉전이 막 끝난 상황에서 소련도 이라크를 지지하지 않았고, 국제사회는 비교적 신속하게 연합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총 34개국이 참여하는 다국적군이 편성되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전쟁 비용 600억 달러 중 360억 달러를 부담하며 연합군을 적극 지원했다.
결정적 순간은 1990년 11월 29일에 찾아왔다. 유엔 안보리는 결의안 678호를 채택하여 이라크가 1991년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모든 필요한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고 승인했다. 이는 사실상 무력 사용에 대한 국제적 승인이었다.
● 1991년 1월 15일: 최후 통첩 만료와 전쟁 개시
1월 15일 자정, 최후 통첩의 시한이 만료되었다. 이라크는 여전히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19시간 후인 1월 16일 오후 7시(미국 동부시간), 공중 폭격으로 이라크를 향한 미국의 첫 공격이 시작되었다.
● 1991년 1월 16일~2월 23일: 공중전 전개
“바그다드에 폭탄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CNN의 버나드 쇼 특파원이 전한 이 실황은 전 세계인들에게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첨단 스텔스 전투기 F-117과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이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연합군의 공중 공격은 압도적이었다. 43일간 지속된 폭격으로 이라크의 방공망, 군사기지, 통신망, 지휘통제소 등이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
이 전쟁은 GPS, 위성 영상, 정밀 유도 무기 등 첨단 기술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현대적 전면전이었다. 언론은 이를 “비디오 게임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이후 많은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이라크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해 스커드 미사일로 반격했지만, 대부분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의해 요격당했다. 이라크 공군은 연합군의 공중 우세 앞에서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 1991년 2월 24일~28일: 지상전 전개와 전쟁 종료
공중 폭격으로 이라크군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자, 2월 24일 연합군은 대규모 지상 공격을 개시했다. 미군의 M1A1 전차와 영국의 챌린저1 전차를 앞세운 연합군은 ‘좌회전 훅’ 작전을 통해 이라크군을 포위했다.
지상전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끝났다. 이라크군은 조직적인 저항을 거의 하지 못했고, 불과 100시간 만에 쿠웨이트에서 완전히 퇴각했다. 2월 28일,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정전을 선언하며 걸프전의 공식적인 종료를 발표했다.
결과와 변화
● 즉각적 결과
걸프전은 연합군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쿠웨이트는 해방되었고, 이라크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철수했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은 여전히 권좌에 남아 있었다. 연합군은 전쟁을 마무리하는 지상전에서 바그다드까지 진격하지 않았고, 후세인 정권을 직접 제거하지 않은 채 전쟁을 마무리했다.
전쟁 이후 이라크는 유엔의 엄격한 감시하에 놓였다. 대량살상무기 사찰, 경제 제재, 비행금지구역 설정 등이 이어졌다. 이라크는 국제적으로 고립된 채 내부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 국제 정치적 변화
걸프전은 냉전 이후 새로운 국제 질서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미국의 유일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가 확인되었고, 유엔을 통한 집단 안보 체제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중동 지역에서는 미국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은 미국과의 안보 협력을 강화했고, 이는 이후 미국의 대중동 정책의 기본 틀이 되었다.
● 군사 기술의 혁신
걸프전은 현대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정밀 타격, 스텔스 기술, 위성 통신의 중요성이 입증되면서 각국은 군사 기술 혁신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후 모든 현대전은 걸프전의 교훈을 바탕으로 계획되고 수행되었다.
● 장기적 영향과 현재까지의 연결점
걸프전이 남긴 가장 큰 과제는 이라크 문제였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재침공은 걸프전의 미완성 과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지만, 오히려 중동 지역의 불안정을 심화시켰다.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이라크는 종파 갈등과 테러리즘에 시달렸고, IS(이슬람국가) 같은 극단주의 세력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2025년 현재에도 중동 지역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다. 이라크 내부의 정치적 갈등, 이란과 미국의 대립, 석유를 둘러싼 지정학적 경쟁 등은 모두 걸프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국제적 이해관계에서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과 전쟁의 한계
1991년 걸프전은 단 42일간의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되었지만, 그 영향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전쟁은 냉전 종식 후 미국 주도의 새로운 세계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 첫 번째 시험대였다.
군사적으로는 완벽한 승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미완의 과제를 남겼다는 점에서 걸프전의 교훈은 복합적이다. 첨단 기술의 압도적 우위로 전술적 승리를 거둘 수 있지만, 복잡한 지역 정치와 종교적 갈등까지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 주었다.
또한 걸프전은 석유 자원을 둘러싼 국제적 이해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중요한지를 재확인시켜 주었다. 에너지 안보가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현실에서, 중동 지역의 안정은 여전히 전 세계의 핵심 관심사로 남아 있다.
결국 걸프전은 현대 국제 정치의 복잡성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다. 기술적 우위와 국제적 연대로 군사적 목표는 달성할 수 있지만, 지역의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보다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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