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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4일(AD 41)] 로마제국 황제 권력의 광기와 몰락: 칼리굴라 암살 사건

△삼복△ 2025. 7. 6. 21:28

AD 41년 1 24, 4년간의 통치로 로마제국을 혼돈에 빠트린 황제 칼리굴라가 암살되다

 

루이 르 그랑, <칼리굴라 황제>(2007)
Louis le Grand, <Emperor Caligula>(2007), Ny Carlsberg Glyptotek 전시품 |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Louis le Grand, CC BY-SA 3.0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

 

돌변한 황제의 광기가 초래한 비극

서기 41 1 24, 로마제국의 팔라티노 언덕에서 로마제국 제3대 황제 칼리굴라가 암살됐다. 불과 4년 전,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즉위했던 황제는 이날, 자신이 지은 공포의 궁전에서 근위대의 칼날에 쓰러졌다. 그는 단 4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제국을 혼돈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그 자신도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이 사건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로마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이 암살은 로마 시민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고, 이후 황제제의 운명에도 중대한 변화를 예고했다.

 

배경 - 제국민의 기대를 절망으로 바꾼 폭군

칼리굴라, 본명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는 37 3 16일 티베리우스 황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그의 애칭 칼리굴라는 군대 생활 시절 신발인 칼리가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가 대중에게 얼마나 친숙했는지를 보여 준다.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양손자였던 그는 로마 시민들로부터 우리의 아들”, “우리의 별이라는 환호를 받으며 황제가 되었다.

이처럼 칼리굴라는 즉위 당시만 해도, 로마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게르마니쿠스이고,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손녀인 아그리피나였기에, 부모 양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물려받아 정통성을 회복하는 인물로 여겨졌다. 또한 황제가 된 직후에는 시민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고 검투사 경기를 부활시키는 등 인기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즉위 7개월 만에 고열로 갑자기 쓰러져 수개월간 혼수상태를 겪었다. (현대의 학자들은 칼리굴라가 환각, 망상, 충동조절장애, 편집증 등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을 유발할 수 있는 급성 뇌염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지만, 성격이 완전히 달라져 이전의 온화한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칼리굴라는 갑자기 폭력적이고 편집증적인 행동을 보이며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고 많은 이들을 처형하였으며,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게 강요하고, 원로원을 경멸하며, 심지어 자신의 말을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하려 하는 등 상식에 벗어난 명령을 내리며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 말에게 직책을 주려 했던 일화는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케 했다. 로마 시민들의 희망은 곧 두려움으로 바뀌었고, 제국 전체가 점차 그 광기의 무대가 되어 갔다.

칼리굴라의 변덕과 잔혹함은 권력층 내부에 불안을 키웠다. 부자들에게 터무니없는 세금을 부과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충성심을 시험하듯 고위 인사들을 공공연히 모욕하거나 처형하는 그의 행동은 로마 귀족, 기사 계급, 군대, 심지어 프라이토리아니(황제 근위대)에게도 극심한 불만을 샀다. 그의 광적인 통치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심지어 자신의 가족 구성원들까지도 그 대상이 되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황제의 행보에 암살 음모는 이미 39년부터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고, 결국 41 1월에는 원로원, 기사 계급, 프라이토리아니 일부까지 암살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 중심엔 카시우스 카이레아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평소 칼리굴라의 조롱에 굴욕감을 느끼고 있었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전개 - 로마의 운명을 건 암살 계획

   41(AD) 1 24일 오전

칼리굴라는 팔라티노 언덕에 위치한 로마 극장에서 열리는 팔라티네 경기에 참석했다. 사실 이날은 그가 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공무를 수행하는 대신 오전 내내 경기를 즐겼다.

   정오 직전

경기가 끝난 후 칼리굴라는 극장에서 나와 연극 배우들과 대화하며 잠시 머물렀다. 이때 암살자들은 이미 그를 노리고 있었다.

   정오 무렵: 암살 실행

칼리굴라는 지하 통로를 통해 목욕탕으로 향했다. 이 통로는 평소 그가 자주 이용하던 길이었고, 비교적 한적하여 암살을 실행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프라이토리아니(황제 근위대) 장교 카시우스 카이레아가 첫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카이레아는 칼리굴라에게 복수심을 품고 있었는데, 칼리굴라가 평소 그를 조롱하며 모욕적인 언행을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카이레아는 고함을 치며 칼리굴라의 목을 칼로 찔렀고, 곧이어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를 비롯한 다른 암살자들이 합류하여 칼리굴라를 무자비하게 난자했다. 인근에 있던 경호 인력은 이변을 눈치채지 못했고, 칼리굴라는 바닥에 쓰러진 채 소리치며 저항했으나, 스무 명 남짓의 암살자들에게 둘러싸여 서른 군데 이상의 자상을 입고 순식간에 끝을 맞이했다.

   암살 직후

칼리굴라가 암살되자 현장 주변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황실 근위대원들과 게르만 근위대원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혼란 속에서 칼리굴라의 네 번째 아내 밀로니아 케소니아와 어린 딸 율리아 드루실라까지 암살자들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옹립

암살자들은 다음 황제를 옹립하기 위해 칼리굴라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를 찾아 나섰다.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의 통치 기간 동안 의도적으로 자신을 나약하고 무능한 것처럼 보이게 하여 칼리굴라의 의심을 피했다. 그는 암살 현장 근처의 커튼 뒤에 숨어 있다가 프라이토리아니(황제 근위대) 병사들에게 발견되었다. 프라이토리아니는 클라우디우스를 프라이토리아니 병영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그를 황제로 선포했다. 원로원은 처음에는 황제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재건하려 했지만, 프라이토리아니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굴복하여 클라우디우스의 황제 즉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와 변화

클라우디우스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면서 로마제국은 일시적 안정을 되찾았다.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의 폭정과는 달리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를 펼쳤다. 그는 고위층의 정치적 지원에 보답하기 위해 막대한 보너스를 지급했고, 결국 원로원도 그를 인정하게 된다. 칼리굴라의 암살과 클라우디우스의 즉위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프라이토리아니(황제 근위대)는 이후 정치적 영향력이 점점 더 커졌다.

그러나 새 황제 즉위에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카시우스 카이레아 등 암살 주동자들은 클라우디우스 집권 초기에 모두 처형됐다. 클라우디우스가 칼리굴라 암살에 직접 가담한 자들을 제거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쿠데타 황제로 보이는 걸 피하기 위해서였다. , 암살자들을 그대로 두면 황제를 죽이면 권력을 얻을 수 있다는 위험한 선례를 남기게 되기 때문에 이 역시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암살자들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정치적 자율성과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다. 암살자들은 초기에 유용했지만, 이후 권력을 공유하려 하거나 그를 조종하려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클라우디우스는 친위대, 일부 원로원파, 신흥 관료층과 새로운 정치 동맹을 맺으며 권력 기반을 재편했고, 암살자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통치 기반을 안정시키는 상징적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럼에도 칼리굴라 암살 사건은 황제의 폭정에 군사력을 가진 인물이 암살로 대응하는 선례를 남기고 말았고, 그 탓에 이후 여러 황제들이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전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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