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5일(146 BC)] 완전히 말살된 고대 문명: 제3차 포에니전쟁과 카르타고 멸망
기원전 146년 2월 5일, 제3차 포에니 전쟁의 끝, 800년 지중해 패권국 카르타고가 완전히 파괴되다
지중해 패권의 종막
BC 146년 2월 5일, 고대 지중해 세계의 균형이 영원히 무너졌다. 이날은 페니키아계 해상 제국 카르타고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날이며, 동시에 로마가 지중해의 절대 패권국으로 부상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약 800년간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며 번영했던 카르타고 문명은 단 하루 만에 완전히 소멸되었고, 이는 한 문명이 다른 문명에 의해 완전히 말살된 고대사의 극단적 사례로 남았다.
배경 - 숙명적 대결, 두 제국의 충돌
카르타고와 로마의 대립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었다. 기원전 9세기 무렵 북아프리카에 세워진 카르타고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며 서방 세계의 경제적 패권을 장악했다. 반면 이탈리아 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제1, 2차 포에니 전쟁을 거치며 카르타고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특히 제2차 전쟁에서 한니발의 칸나에 대승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하며 가혹한 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막대한 배상금과 함대 해체, 로마 승인 없는 군사 행위 금지 등의 제약 속에서도 카르타고는 놀라운 경제적 회복을 보였다.
로마 내에서는 카르타고의 재기에 대한 깊은 우려가 확산되었다. 원로원 의원 대 카토는 “카르타고는 반드시 멸망해야 한다(Delenda est Carthago)”는 말을 매번 연설에서 반복하며 강경론을 주도했다.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의 지속적인 국경 침공은 카르타고를 궁지로 몰아넣었고, 결국 카르타고가 자위권을 행사하자 로마는 이를 조약 위반으로 간주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전개 - 3년간의 포위와 최후의 저항
● 기원전 149년 - 전쟁의 발발
로마군 약 8만 명이 북아프리카 우티카에 상륙하며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모든 무기의 인도와 시민 전체의 내륙 이주. 첫 번째 조건은 받아들여졌지만, 해상 무역이 생명선인 카르타고에게 해안에서 16km 떨어진 내륙으로의 이주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 기원전 149년 ~ 147년 - 필사의 저항
협상이 결렬되자 카르타고 시민들은 필사의 저항을 선택했다. 카르타고 여성들은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활의 시위로 만들었고, 카르타고군은 20km에 달하는 강력한 성벽에 의지한 방어전을 펼쳤다. 카르타고의 강력한 저항에 초기 로마 사령관들은 예상보다 더 고전을 면치 못했다.
● 기원전 147년 - 스키피오의 등장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로마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영웅의 양손자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카르타고 항구를 봉쇄하고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 기원전 146년 2월 5일 - 최후의 순간
로마군이 마침내 도시 방어벽을 뚫고 시내로 진입했다. 6일간의 치열한 시가전이 이어졌고, 카르타고 시민들은 한 집 한 집을 요새 삼아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마지막 거점인 에슈문 신전에서 900여 명이 자결하거나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50만 명이 넘던 인구 중 약 5만 명만이 생포되어 노예로 팔려갔고, 도시는 완전히 불타 사라졌다.
결과와 변화
● 정치적 변화
카르타고의 완전한 소멸로 로마는 지중해 서부의 절대 패권을 확립했다. 카르타고 영토는 아프리카 속주로 편입되었고, 이는 로마가 본격적인 제국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로마는 더 이상 동등한 경쟁자 없이 지중해 전역을 “우리의 바다(Mare Nostrum)”로 만들 수 있었다.
● 사회적 변화
카르타고인들의 대부분이 학살되거나 노예로 팔려나가면서 페니키아 문화의 직접적인 전승체가 사라졌다. 카르타고의 문헌과 기록들이 체계적으로 파괴되면서 그들의 역사와 문화는 승자인 로마의 시각에서만 전해지게 되었다. 이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문화적 다양성이 크게 축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국제적 변화
카르타고의 멸망은 고대 지중해 세계에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어냈다. 로마의 압도적 힘을 목격한 다른 국가들은 로마와의 정면 대결보다는 동맹이나 복속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는 이후 로마가 비교적 적은 저항으로 동방 진출을 할 수 있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다양한 문명 공존의 중요성
카르타고의 멸망은 단순한 고대사의 한 장면이 아니다. 이는 강대국의 패권 다툼과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약자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2025년 현재에도 강대국 간의 경제적, 군사적 경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약소국들이 겪는 어려움은 카르타고의 운명을 연상시킨다.
“카르타고는 반드시 멸망해야 한다”는 카토의 말은 이념적 적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가 어떤 극단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경제적 회복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선제적으로 제거하려는 로마의 논리는 오늘날 국제 정치에서도 여전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기원전 146년 2월 5일의 카르타고 멸망은 한 문명의 종말이자 새로운 제국의 시작이었다. 로마가 얻은 것은 지중해의 패권이었지만, 인류가 잃은 것은 다양한 문명의 공존 가능성이었다. 이 사건이 남긴 교훈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평화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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