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1904)] 동아시아 패권을 뒤바꾼 전쟁: 러일전쟁 발발
1904년 2월 8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 동아시아에 터져 나온 포성
제국주의 시대, 격동의 동아시아
1904년 2월 8일 밤, 중국 뤼순항의 고요함을 깨뜨린 일본 해군의 포탄 소리로 시작된 러일전쟁은 아시아 국가가 서구 강국을 꺾은 최초의 근대전이자, 20세기 동아시아 질서를 완전히 재편한 역사적 분기점이었다.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이어지는 이 전쟁을, 당시 격동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살펴본다.
제국들의 야욕이 충돌하는 체스판
19세기 말 동아시아는 거대한 체스판과 같았다.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일본이 요동반도와 타이완을 얻으려 하자, 러시아·독일·프랑스가 나섰다.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기세를 꺾으면서, 러시아는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러시아의 목표는 명확했다. 얼어붙지 않는 부동항을 확보하고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것.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과 함께 만주 진출을 본격화한 러시아는 뤼순항을 조차하며 남하정책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반면 일본은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한반도를 노리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게 ‘부국강병’의 완성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의미했다.
이 두 제국 사이에 낀 것이 바로 대한제국(조선)이었다.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시도했지만, 실상은 두 강국의 각축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가 한반도 북부의 용암포를 조차하려 하자 일본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결정적 변화는 1902년 영일동맹의 체결이었다. 러시아 견제라는 공동 이익을 가진 영국과 일본이 손을 잡으면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한 국제적 고립을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무대는 준비되었고, 두 제국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전개 - 1년 7개월간의 치열한 전황
● 전쟁 개시 직전(1904년 1월 ~ 2월 초): 마지막 협상과 결단의 순간
1904년 1월, 세상은 아직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러시아와의 협상을 계속해야 할까, 아니면 무력으로 해결해야 할까? 일본은 마지막 외교적 노력으로 러시아에 만주 철수와 한반도에서의 일본 우위권 인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답변은 차가웠다.
2월 6일, 일본은 러시아와의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이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는 비밀리에 작전 명령을 받아들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신념이 있었다. “적함대를 먼저 무력화하지 않으면 육군의 대륙 진출은 불가능하다.” 운명의 48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 개시 직후(1904년 2월 8일 ~ 3월): 진주만보다 37년 앞선 기습
2월 8일 밤 10시 30분, 뤼순항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평온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일본 구축함들이 나타나 어뢰를 발사했다. 선전포고도 없는 기습이었다. 러시아의 전함 레트비잔과 차레비치가 타격을 받으며 뤼순항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같은 시각 인천항에서는 또 다른 드라마가 펼쳐졌다. 러시아 순양함 바랴크호 함장 루드네프는 “러시아 해군은 적에게 항복하지 않는다!”라며 일본의 항복 요구를 단칼에 거부했다. 2월 9일 오전, 바랴크호는 일본 함대와의 절망적인 전투에 나섰다. 수적 열세를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결국 바랴크호는 자침했고, 그 용맹한 최후는 훗날 러시아 민요로까지 불릴 정도로 유명해졌다.
2월 10일, 일본은 뒤늦게 선전포고를 했다.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동양의 작은 섬나라가 거대한 러시아 제국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많은 서구 관찰자들은 일본의 무모한 도전이라고 여겼다.
● 전쟁 중반(1904년 3월 ~ 1905년 1월): 육해의 격전과 뤼순의 비극
일본군은 신속하게 인천에 상륙하여 한반도를 장악했다. 고종 황제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이미 늦었다.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며 한반도를 전쟁 수행의 발판으로 삼았다. 4월, 일본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넜다. 5월 1일 압록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한 순간, 아시아 군대가 유럽 군대를 정면승부에서 이긴 역사상 최초의 사례가 기록되었다.
하지만 진짜 지옥은 뤼순에서 펼쳐졌다. 러시아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자랑하던 뤼순 공방전은 8월부터 시작되어 이듬해 1월까지 이어졌다. 일본군은 ‘203고지’라 불린 전략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수없이 돌격을 감행했다. 기관총과 철조망, 지뢰가 설치된 현대식 요새 앞에서 일본군은 하루에 수천 명씩 전사했다.
노기 마레스케 일본 3군 사령관은 자신의 두 아들도 이 전투에서 잃었다. 그는 매일 밤 전사자 명단을 보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러시아 수비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테셀 중장 휘하의 러시아군은 끝까지 버텼지만, 보급로가 끊기고 질병이 창궐하면서 서서히 무너져갔다. 1905년 1월 2일, 뤼순이 마침내 함락되었을 때 양측 모두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참혹한 상태였다.
● 전쟁 후반(1905년 2월~5월): 봉천의 대회전과 바다의 결전
뤼순 함락 후 일본군의 기세는 대단했다. 하지만 러시아도 만만하지 않았다. 쿠로파트킨 장군이 이끄는 만주군은 봉천(현재의 선양)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1905년 2월 20일부터 3월 10일까지 벌어진 봉천 전투는 양측 합쳐 60만 명 이상이 참전한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육상전이었다.
전선은 100킬로미터에 걸쳐 형성되었다. 오야마 이와오 일본군 총사령관은 러시아군을 포위하려 했고, 쿠로파트킨은 이를 막으려 했다. 18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이 승리했지만, 러시아군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며 전력을 보존했다. 육상에서는 승부가 완전히 결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바다에서 운명적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러시아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발트해에서 파견한 제2태평양함대, 일명 발틱함대가 7개월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극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이 함대는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을 건너 일본 근해에 도달했다. 하지만 긴 항해로 지친 러시아 함대 앞에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일본 연합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5월 27일 오후 1시 55분, 쓰시마 해협에서 운명의 해전이 시작되었다. 도고 제독의 ‘T자 전법’이 성공하면서 러시아 함대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28일이 끝날 무렵, 38척 중 34척을 잃은 러시아 함대는 사실상 전멸했다. 반면 일본은 어뢰정 3척만 잃었을 뿐이었다. 이 놀라운 승리로 러시아의 전쟁 의지는 완전히 꺾였다.
● 종전과 그 직후(1905년 6월~9월): 혁명과 협상, 그리고 승리의 대가
쓰시마 해전의 충격은 러시아 전역을 뒤흔들었다. 이미 1월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시작된 1905년 혁명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6월에는 흑해함대의 전함 포템킨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니콜라이 2세 황제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중재에 나섰다. 그는 일본의 승리를 인정하면서도 러시아가 완전히 몰락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8월,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강화 회담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과 러시아의 비테 전 재무대신이 마주앉았다.
일본은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협상에서는 고전했다. 전쟁 배상금을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단호히 거부했다. 비테는 “우리는 패배했지만 굴복하지는 않았다”고 맞섰다. 결국 9월 5일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은 사할린 남부, 뤼순·다롄의 조차권, 남만주 철도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다. 하지만 배상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이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도쿄에서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국민들은 “왜 배상금도 못 받고 사할린 전체도 못 가져왔느냐”며 분노했다. 히비야 공원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고, 계엄령이 선포되기까지 했다. 승리했지만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동양의 작은 섬나라가 서구 열강을 꺾었다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결과와 변화
● 정치적 변화: 동아시아 패권의 재편
러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정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일본은 명실상부한 지역 강국으로 부상했고, 러시아는 극동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대한제국이었다. 전쟁 중 일본의 사실상 보호국이 된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조약을 거쳐 1910년 완전히 일본에 병합되는 비극을 맞았다.
● 사회적 파장: 아시아 민족주의의 각성
아시아 국가가 유럽 강국을 이긴 최초의 사례는 전 세계 피지배 민족들에게 충격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인도, 동남아시아, 중동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승리에서 서구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동시에 러시아에서는 전쟁 패배가 1905년 혁명으로 이어지며 제정 체제의 동요가 시작되었다.
● 국제적 영향: 20세기 질서의 서막
러일전쟁은 19세기 유럽 중심의 국제질서가 흔들리는 신호탄이었다. 일본의 승리는 ‘황화론(黃禍論)’을 자극하며 서구 사회에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이 전쟁에서 드러난 근대적 무기의 파괴력과 총력전의 양상은 10년 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조였다.
● 한국과의 연계: 식민지배의 시작
한국에게 러일전쟁은 국권상실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전쟁 중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제약했고, 전쟁 후에는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했다. 이는 36년간의 일제강점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지정학적 요충지, 한반도
2025년 현재, 한반도는 여전히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지정학적 요충지이며, 일본의 과거사 문제는 주변국과의 외교 갈등 요인으로 남아있다. 미중 경제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현재 상황은 120년 전 제국들의 각축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있다.
러일전쟁은 한 시대의 종료이자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다. 아시아가 서구에 맞서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준 이 전쟁은, 동시에 제국주의적 팽창이 가져올 비극의 씨앗이기도 했다. 1904년 2월 8일 밤 뤼순항에 울려 퍼진 포성은 20세기 동아시아 역사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120년, 현재의 우리는 여전한 지정학적 조건 속에서 평화로운 미래를 향한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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