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1258)] 이슬람 황금기의 종말: 바그다드 함락
1258년 2월 10일, 몽골의 팽창과 이슬람 세계의 분열로 멸망을 맞이한 아바스 왕조
이슬람 황금기의 중심, 폐허가 되다
1258년 2월 10일, 몽골군이 바그다드 성벽을 돌파하며 이슬람 문명의 심장부에 칼을 꽂았다. 100만 명이 거주하던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가 불타올랐고, 500년간 이어진 아바스 칼리프조가 막을 내렸다. 이는 단순한 도시의 함락이 아니라,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역사적 분수령이었다.
배경 - 두 세계의 충돌
8세기 중엽 건국된 아바스 칼리프조는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아 중동,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를 아우르는 거대한 이슬람 제국이었다. ‘지혜의 집’으로 대표되는 학문 기관들이 자리 잡았고, 의학, 철학, 수학, 천문학 분야에서 찬란한 성과를 이뤄냈다. 그러나 13세기 무렵 내부 부패와 외부 침입, 이슬람 내부 분열로 국력이 현저히 쇠퇴한 상태였다.
칼리프 알무스타심은 여전히 종교적 권위를 유지했지만, 실질적 통치력은 지역 세력들에게 분산되어 있었다. 바그다드의 방어 체계는 과거의 영광에 미치지 못했고, 종파 간 갈등이 만연하여 단결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한편 칭기즈 칸이 창건한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며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1251년 몽케 칸이 대칸으로 즉위한 후, 그의 동생 훌라구에게 서방 원정의 총지휘를 맡겼다. 훌라구는 몽골 제국 전체 병력의 20%에 해당하는 약 1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1253년부터 서진을 시작했다.
1256년 훌라구는 먼저 이란의 이스마일파 암살단의 요새 알라무트를 함락시키며 그들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했다. 이후 바그다드로 향한 몽골군은 칼리프에게 항복과 조공을 요구했지만, 알무스타심은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며 이를 거부했다.
전개 – 몽골의 진군과 최후 13일간의 전투 양상
● 1257년 11월~12월: 포위망 형성
훌라구는 바그다드 공성을 위해 3개 방면군으로 병력을 분산 배치했다. 좌군은 남쪽 루리스탄을, 우군은 북쪽 이르빌을, 본진은 바그다드로 직진했다. 몽골군은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며 공성 준비를 마쳤다.
● 1258년 1월 16일: 첫 번째 충돌
바그다드 외곽에서 아바스군 2만 명이 몽골 선발대와 충돌했다. 초기에는 칼리프군이 몽골군을 후퇴시키는 듯했으나, 몽골군이 두자일 운하의 제방을 파괴해 아바스군 진영을 침수시키며 상황이 역전되었다.
● 1258년 1월 29일: 총공세 개시
몽골군은 투석기와 화살을 동원해 바그다드 성벽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중국인 기술자 곽칸이 지휘하는 공병대가 동원되어 성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 1258년 2월 4일~5일: 마지막 협상 시도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칼리프는 뒤늦게 항복을 제안했다. 그러나 훌라구는 “진작에 항복하지 않은 자만심이 도시의 파멸을 초래했다”며 이를 거부했다.
● 1258년 2월 10일: 바그다드 함락
몽골군이 마침내 성벽을 완전히 돌파하고 도시 내부로 진입했다. 칼리프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지만, 이미 도시의 운명은 결정된 후였다.
● 1258년 2월 13일: 칼리프 처형과 대학살
칼리프 알무스타심은 몽골의 전통 방식에 따라 양탄자에 감싸져 말에 밟혀 죽었다. 몽골인들은 왕족의 피가 땅에 흘리는 것을 금기시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일주일간 바그다드는 상상할 수 없는 대학살과 파괴의 현장이 되었다.
결과와 변화
● 정치적 관점: 칼리프조의 종말
500년간 이어진 아바스 칼리프조가 완전히 멸망했다. 이후 이슬람 세계는 중앙 권위를 잃고 여러 지역 세력으로 분화되었다. 비록 맘루크 왕조가 카이로에서 아바스 후손을 명목상 칼리프로 옹립했지만, 실질적 권위는 회복되지 못했다.
● 사회적 관점: 문화적 대재앙
‘지혜의 집’을 비롯한 수많은 도서관이 파괴되었다. 몽골군은 수십만 권의 서적을 티그리스강에 던져 “강물이 잉크로 까매졌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100만 명에 달하던 바그다드 인구는 1000명 남짓으로 급감했다. 이는 인류사상 가장 큰 문화적 손실 중 하나로 기록된다.
● 국제적 관점: 세력 균형의 변화
바그다드 함락으로 이슬람 문명의 중심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카이로, 이후 오스만 제국으로 이동했다. 몽골의 일한국이 중동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1260년 맘루크 왕조와의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패배하며 서방 진출이 저지되었다. 이는 몽골 제국 확장의 서쪽 한계점이 되었다.
한 시대와 문명의 붕괴를 낳은 몽골군의 행적
1258년 바그다드 함락은 오늘날까지 중동과 이슬람 세계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후 바그다드 국립박물관 약탈이나 시리아 내전 중 팔미라 유적 파괴는 과거 몽골군의 행위와 겹쳐지며, 전쟁이 문화유산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을 보여준다.
현재 바그다드는 600만 명이 거주하는 대도시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잦은 분쟁과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다. 1258년의 비극은 문명의 취약성과 기록 보존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다. 종교 권위와 정치 권력의 분리, 외부 침입에 대한 실질적 대응 능력의 중요성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교훈이다.
바그다드 함락은 단지 도시 하나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한 시대와 문명, 인류의 유산이 파괴된 순간이었다.
▼ 관련 글
[1월 2일(1492)] 스페인의 세계적 팽창 시작점: “그라나다 함락”
[1월 2일(1492)] 스페인의 세계적 팽창 시작점: “그라나다 함락”
1492년 1월 2일, 800년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통치의 종말: “그라나다 함락” 역사의 분수령이 된 하루1492년 1월 2일, 스페인 남부의 아름다운 도시 그라나다. 마지막 이슬람 술탄 보아브딜이 알함
sambok-cb.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