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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1979)] 제국의 마지막과 신정국가의 탄생: 이란 혁명

by △삼복△ 2025. 7. 26.

1979 2 11,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팔레비 왕조, 스스로 2,500년 페르시아 왕실을 무너뜨리다

 

1979년 테헤란, 다리와 도로를 가득 메운 반정부 시위대
1979년 테헤란, 다리와 도로를 가득 메운 반정부 시위대.

 

팔레비 왕조의 독재로 강행된 서구화 정책

1979 2 11,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군부가 중립을 선언하는 순간, 2,500년에 걸친 페르시아 왕정 역사가 막을 내렸다. 팔레비 왕조의 마지막 군주 모하마드 레자 샤는 이미 보름 전 나라를 떠났고,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환호하며 맞이한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새로운 권력의 중심에 섰다. 이는 서구식 근대화와 이슬람 전통의 충돌, 독재에 맞선 민중의 저항, 그리고 종교 지도자가 이끄는 최초의 현대적 혁명이 만들어낸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배경 - 근대화와 전통 사이의 갈등

팔레비 왕조는 20세기 중반 이란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려 했다. 특히 모하마드 레자 샤는 1963년부터 백색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토지개혁, 여성 참정권 확대, 산업화를 추진했다. 경제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혜택이 고르게 분배되지 않았고, 사회 규범과 제도에 미치는 변화의 파급력은 광범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러한 서구화 정책은 이란 사회의 깊은 균열을 만들어냈다. 성직자층과 전통 시장 상인들은 이슬람 문화와 전통 가치의 훼손을 우려했고, 농촌 사회의 붕괴로 도시로 밀려든 빈민들은 현대적 도시 이란의 문화적 공허함에 실망했다. 더욱이 샤 정권은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통한 정치적 탄압과 언론 통제로 독재 체제를 강화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시아파 성직자 루홀라 호메이니가 저항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는 팔레비 정권의 부패와 서구화를 맹렬히 비판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호메이니는 샤의 정책에 반대하여 1964년 추방되었지만, 망명 중에도 이라크와 프랑스에서 혁명 메시지를 계속 전달하며 혁명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테이프와 문서 형태로 밀반입된 호메이니의 연설은 대중 동원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한 관료는 테이프가 전투기보다 강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경제적 문제들이 정치적 불만과 결합했다. 석유 가격 변동과 서구 석유 소비의 변화는 이란 경제를 위협했고, 급속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과 구매력 정체가 이어졌다. 샤의 미국 의존성과 이스라엘과의 밀접한 관계는 반서구 정서를 더욱 부채질했다.

 

전개 - 타오르는 혁명의 불길

   1977년 하반기~1978년 초: 저항의 시작

인권 변호사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팔레비 샤의 인권 탄압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1978 1, 이란 정부 신문에 실린 호메이니 비난 기사는 종교 도시 콤(Qom)에서 학생 시위를 촉발했다. 이 시위가 폭력적으로 진압되면서 혁명의 불씨가 당겨졌고, 이후 40일 추모 관습에 따라 희생자 추모 시위가 연쇄적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78년 여름~가을: 전국적 봉기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지고, 특히 석유 노동자들의 파업은 이란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학생, 상인, 종교인 등 다양한 계층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매일같이 테헤란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벌어졌다.

9 8, 테헤란의 자레 광장에서 벌어진 시위에 군이 발포하여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검은 금요일사건은 반정부 정서를 극대화했다. 수천 명의 비무장 시위대가 샤의 군대에 의해 살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위 참가자의 수는 계속 증가했으며, 전국 도시에서 최대 900만 명의 이란인들이 거리로 나왔다.

   1979 1 16: 샤의 마지막 출국

1979 1 16,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샤가 공식적으로는 휴가라는 명목으로 이란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출국하면서 샤푸르 바크티아르 총리에게 이란을 당신과 하느님께 맡긴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크티아르의 과도 정부는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실질적인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1979 2 1: 호메이니의 귀환

15년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테헤란으로 귀국했다. 수백만 명의 인파가 그를 환영하기 위해 운집했으며, 이는 혁명의 절정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호메이니는 즉시 메흐디 바자르간을 임시 총리로 임명하며 바크티아르 정부에 맞서는 평행 정부를 수립했다.

   1979 2 11: 왕정의 종말

2 11, 이란 군부가 현재의 정치적 분쟁에서 중립을 선언하며 추가적인 무질서와 유혈사태를 방지하기 위해모든 군인들을 기지로 복귀시켰다. 혁명 세력과 반란군이 팔레비 충성파를 무장전투에서 압도하면서 호메이니가 권력을 장악했다.

이날로 2,500년에 걸친 페르시아 왕정이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했다.

 

결과와 변화

   정치적 변화: 이슬람 공화국의 수립

1979 2 1일부터 11일까지의 기간은 매년 이란에서 파즈르의 10로 기념되며, 2 11일은 이슬람 혁명 승리의 날로 국가 공휴일이 되었다. 4 1일 국민투표를 통해 이란 이슬람 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고, 호메이니는 최고지도자로서 정치와 종교의 궁극적 권력을 확보했다. 이는 세속 국가가 아닌 종교 지도자가 통치하는 신정 체제로, 정교 분리가 아닌 정교 일치의 새로운 정치 모델을 제시했다.

초기 혁명 과정에서는 좌파, 자유주의자, 이슬람주의자, 학생 등 이질적 세력들이 단일 목표(왕정 타도)로 결집했지만, 혁명 후에는 성직자들이 다른 세력들을 제거하며 권력을 독점했다. 구 왕정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좌파 인사, 소수민족 등 반대파가 탄압당하는 또 다른 형태의 독재가 출현했다.

   사회적 변화: 이슬람 율법의 적용

이란 사회는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따라 전면적으로 재편되었다. 여성의 히잡 착용이 의무화되고, 주류가 금지되는 등 종교적 규제가 엄격히 적용되었다. 서구 문화는 금지되고 전통적인 이슬람 법과 그 처벌이 부활했다. 하지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개방과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나왔으며, 2022년 마흐사 아미니 시위와 같이 히잡 의무 착용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국제적 변화: 중동 질서의 재편

이란 혁명은 특히 페르시아만 지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혁명적 목표를 가진 새로운 권력이 등장했고, 이는 군주제들을 전복시키려는 목적을 포함하고 있어 기존 질서를 크게 위협했다. 1979 11월 테헤란 미국 대사관 점거 및 인질 사건이 발생하면서 미국과 서방과의 국교가 단절되었고, 경제 제재가 본격화되었다.

이라크의 이란 침공은 인구를 호메이니 주변으로 결집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 공화국에 반대하는 네트워크를 활성화시켰다. 아랍 세계의 사담에 대한 지지와 전쟁의 페르시아만 확산은 점차 미국을 중동의 주요 군사력으로 끌어들였다. 이란은 중동 지역에서 시아파 세력을 지원하는 저항의 축전략을 추진하며, 레바논 헤즈볼라, 예멘 후티 반군, 이라크와 시리아 내 시아파 민병대 등을 지원했다.

 

신정국가의 탄생과 지역 질서의 재편

1979년 이란 혁명은 종교 지도자가 주도한 최초의 근대 혁명이자, 서구식 근대화를 거부하고 전통과 종교 가치를 중심으로 한 대안 체제를 실현한 사건이었다. 혁명의 지속적인 영향은 이슬람 단체들의 권한 강화였으며, 이들은 이제 단순한 반대파가 아닌 통치자로서 자신들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2025년 현재, 이란은 여전히 이슬람 공화국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국가의 최고 권력자로서 모든 분야에서 최종 결정권을 행사하고 있다. 핵 프로그램, 중동 내 영향력 확대, 서방과의 갈등 등은 모두 1979년 혁명의 직접적인 유산이다.

하지만 혁명이 약속했던 정의, 자주, 자유의 이상은 여전히 미완에 머물러 있다. 경제난, 젊은 세대의 불만, 여성의 자유 요구 등으로 내부 갈등이 고조된 상태이며,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시민 저항은 혁명 체제 자체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란의 혁명은 초급진적 입장에서 보다 온건하고 실용적인 입장으로 진화하는 독특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이란 혁명은 민중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그것은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체제와 가치, 외교 노선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대 전환점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중동 정치 지형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혁명의 완성 여부를 놓고는 여전히 논란이 지속되고 있지만, 그 역사적 파급력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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