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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0일(1649)] “왕도 법 위에 있지 않다”: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처형

by △삼복△ 2025. 7. 12.

1649 1 30, 영국 국왕이 재판을 받고 처형되다

 

1683년 1월 4 일 J. 날슨이 작성한 "찰스 1세 재판 기록"의 판화. (대영박물관 소장)
1683년 1월 4 일 J. 날슨이 작성한 "찰스 1세 재판 기록"의 판화. (대영박물관 소장) |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절대권력과 법정 질서가 맞선 역사적 순간

1649 1 30일 화요일, 영국의 국왕 찰스 1세가 런던 화이트홀의 뱅퀘팅 하우스 앞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이는 세계 역사상 군주가 의회와 법정의 결정에 의해 처형된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하느님의 대리인이라 여겨지던 국왕이 한순간에 단두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절대왕정 시대의 종말과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배경 - 절대왕정과 의회의 대립

17세기 초반 영국은 종교적 갈등과 정치적 불안이 겹친 격동의 시대였다. 튜더 왕조의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라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1625년 즉위하면서 아버지보다 더욱 강력한 절대왕정을 추구했다.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굳게 믿었다. 이는 국왕의 권력이 신으로부터 부여된 것이므로 어떠한 인간의 법률이나 의회에도 구속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의회의 동의 없이 과세를 강행하고, 1629년부터 1640년까지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는 무의회 통치를 단행했다. 이 기간 동안 찰스 1세는 스타 체임버와 고등위원회 같은 특별 법원을 통해 반대 세력을 탄압했다.

특히 종교 문제는 갈등의 핵심이었다. 찰스 1세는 즉위 첫 해에 가톨릭 신자인 프랑스 공주 앙리에타 마리아와 결혼하여 많은 영국 프로테스탄트들을 분노하게 했다. 또한 스코틀랜드에 성공회식 기도서 사용을 강요하면서 발생한 주교 전쟁은 청교도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마지못해 소집한 의회는 왕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권리 신장을 주장했다.

 

전개 - 내전에서 처형까지의 여정

   1640: 장기의회 소집과 개혁 요구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비용 문제로 찰스 1세는 다시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이 의회는 20년 가까이 지속될 장기의회가 되었다. 의회는 왕의 전제적 통치에 맞서 스타 체임버와 고등위원회 등 특별 법원들을 폐지하고, 의회 동의 없는 과세를 금지하는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1642: 영국 내전 발발

찰스 1세가 의회 지도자들을 체포하려 시도하면서 왕과 의회 간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왕이 군대를 이끌고 의회에 대항하면서 영국 내전이 시작되었다. 왕당파는 주로 귀족과 젠트리, 성공회 교도들이었으며, 의회파는 런던의 상인들과 청교도 세력이 주축을 이루었다.

   1645: 뉴 모델군과 네이즈비 전투

의회파는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뉴 모델군을 창설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엄격한 규율과 종교적 열정으로 무장한 뉴 모델군은 네이즈비 전투에서 왕당파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1646: 찰스 1세의 항복과 배신

전세가 불리해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군에 항복했지만, 스코틀랜드군은 그를 의회에 넘겼다. 그러나 찰스 1세는 감금 상태에서도 다양한 세력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했다.

   1647~1648: 2차 내전과 신뢰의 붕괴

찰스 1세는 결국 탈출하여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고 제2차 내전을 일으켰다. 이러한 배신 행위는 의회와 군대 내에서 왕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크롬웰의 뉴 모델군이 다시 한번 왕당파와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다.

   1648 12: 프라이드의 숙청

승리한 군대는 의회 내에서 왕과 협상하려는 온건파 의원들을 숙청하는 프라이드의 숙청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잔부의회라고 불리는 소수의 급진적인 의원들만이 남게 되었다.

   1649 1 20~27: 전례 없는 재판

잔부의회는 찰스 1세를 폭군, 반역자, 살인자, 그리고 나라의 공공의 적이라는 명목으로 기소하고 고등재판소를 구성했다. 찰스 1세는 재판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자신은 신으로부터 권력을 받은 왕이므로 어떤 인간의 법정에도 설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러한 항변을 무시하고 1 27일 사형을 선고했다.

   1649 1 30: 역사적 처형

런던 화이트홀 궁전 앞 단두대에서 찰스 1세는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되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왕권신수설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침착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처형 직후 일부 군중은 그의 피를 기념품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결과와 변화

   정치적 변화: 공화정 수립과 왕정 복고

찰스 1세의 처형 직후 영국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올리버 크롬웰을 중심으로 한 잉글랜드 연방(Commonwealth)’이 수립되었고, 일시적으로 군주 없는 통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제 연방은 크롬웰의 개인 독재 체제로 굳어졌으며, 시민의 자유와 표현은 오히려 더 억압되었다.

크롬웰 사망 후 내부 혼란으로 1660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찰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절대왕정은 불가능했다. 찰스 1세 처형에 관여한 국왕 살해자들은 대부분 처벌받거나 도망쳤지만, 왕권에 대한 제한과 의회의 권한 강화라는 큰 흐름은 되돌릴 수 없었다.

   사회적 변화: 법의 지배 확립

찰스 1세의 처형은 왕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원칙을 강력하게 천명했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치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선례가 되었다. 또한 국가의 주권이 신이 아닌 국민에게 있다는 근대적 사상의 씨앗을 뿌렸다.

   국제적 영향: 유럽 군주제에 대한 충격

찰스 1세의 처형은 유럽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다른 유럽 군주들은 이를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으며, 영국의 공화정을 고립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건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절대왕정에 대한 비판적 사고의 근거를 제공했다.

 

역사를 넘어선 현대 민주주의의 뿌리

찰스 1세의 처형은 절대권력에 대한 거부와 민주주의적 가치의 승리를 상징하는 역사적 분수령이었다. 이 사건은 이후 1689년 권리장전을 통한 입헌군주제 확립과 전 세계 민주주의 발전의 모델이 되었다.

2025년 현재, 영국은 찰스 3세가 통치하는 입헌군주국으로, 군주와 의회의 권한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다. 국왕은 국가원수로서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실질적인 통치권은 국민이 선출한 의회와 정부에 있다. 이는 376년 전 찰스 1세의 처형이 던진 주권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영국의 답변이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적으로 권위주의적 통치에 저항하고 민주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정치 권력자의 법적 책임, 권력의 남용에 대한 견제, 시민의 권리 보장 등의 문제에서 찰스 1세의 처형은 여전히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제공한다. 그의 죽음은 어떤 권력도 법 위에 있을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확인시켜 준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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