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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1861)] 미국 남북전쟁의 서막: 캔자스주 연방 가입

by △삼복△ 2025. 7. 11.

1861 1 29, 첨예한 가치 충돌의 전장 피의 캔자스’, 노예제를 버리고 자유와 평등을 택하다

 

미국 남북전쟁 중 반군 게릴라 퀀트릴이 캔자스주 로렌스시를 습격하여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
1863년 8월 21일, 미국 남북전쟁 중 반군 게릴라 퀀트릴이 캔자스주 로렌스시를 습격하여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 남북전쟁 발발의 직접적 신호탄이 된 캔자스주는, 내전에서 연방군 측에 적극 참전하였고, 인구 대비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자유평등과 노예제 사이의 격전지

1861 1 29, 미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가 펼쳐졌다. 캔자스 준주가 미합중국의 34번째로 연방에 가입하는 그날, 대륙 전체가 내전의 그림자 속에 있었다. 수년간 피의 캔자스로 불리며 자유평등과 노예제라는 첨예한 가치 충돌의 전장이었던 지역이 마침내 자유주가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 가입은 미국 사회의 근본적인 분열을 상징하는 동시에, 곧 터질 남북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캔자스의 이야기는 민주주의와 자유평등을 위한 투쟁의 역사이자, 때로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있는 교훈이다.

 

배경 - 노예제 확산을 둘러싼 미국의 분열

19세기 중반, 미국은 서부로의 급속한 팽창과 함께 노예제 확산 문제로 심각한 내부 갈등을 겪고 있었다. 1820년 미주리 타협(Missouri Compromise: 미주리주()의 연방 가입에 관해 북부의 자유주와 남부의 노예주 간에 타협한 협정)은 북위 36 30분선을 기준으로 노예제 확산을 제한했지만,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1850년 타협 역시 캘리포니아의 자유주 가입과 도망노예법 강화로 남북 간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을 뿐이다.

결정적 전환점은 1854년 스티븐 더글러스 상원의원이 제안한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이었다. 이 법은 미주리 타협을 폐지하고 인민주권원칙에 따라 각 준주 주민들이 직접 투표로 노예제 허용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표면적으로는 민주적 해결책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노예제 확산을 위한 남부의 전략이었다.

캔자스는 지리적으로 노예주인 미주리와 인접해 있어 노예제 찬성파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북부의 반노예제 단체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뉴잉글랜드 이주회사 같은 조직들은 자유주 이념을 가진 이주민들을 대거 캔자스로 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 세력의 정면충돌이 불가피해졌다.

 

전개 노예제를 둘러싼 5년간의 유혈사태

   1854: 갈등의 시작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이 통과되자 노예제 찬반 세력이 캔자스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미주리의 국경 난동자들이 선거에 개입하여 불법 투표를 자행했고, 북부에서는 조직적으로 반노예제 이주민을 파견했다.

   1855: 두 개의 정부 수립

노예제 찬성파가 선거에서 승리하여 준주 의회를 장악했지만, 반노예제파는 이를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토피카에서 별도의 자유주 헌법과 정부를 수립했다. 캔자스에는 서로 다른 헌법을 가진 두 개의 정부가 대립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1856: 폭력의 절정

5월 로렌스 약탈 사건이 발생했다. 노예제 찬성파 무장집단이 반노예제 거점 도시 로렌스를 습격하여 신문사와 호텔을 파괴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급진적 반노예제 운동가 존 브라운이 포타와토미 크릭에서 노예제 찬성파 5명을 살해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캔자스는 피의 캔자스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1857: 레컴턴 헌법 논란

노예제 찬성파가 주도한 레컴턴 헌법이 제정되었지만, 반노예제파는 투표를 보이콧했다.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이 이를 지지했으나 의회의 반대로 재투표가 명령되었고, 결국 부결되었다.

   1859: 와이언닷 헌법 채택

노예제를 금지하는 와이언닷 헌법이 주민투표에서 통과되었다. 이는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1861 1 29: 연방 가입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로 의회 내 노예제 찬성 세력이 약화되자, 캔자스의 연방 가입법이 통과되었다.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이 서명하면서 캔자스는 공식적으로 34번째 주가 되었다.

 

결과와 변화

   정치적 변화

캔자스의 자유주 가입은 남북전쟁 발발의 직접적 신호탄이 되었다. 남부 주들은 이를 북부의 도발로 받아들였고, 불과 몇 달 후 포트 섬터 공격으로 내전이 시작되었다. 캔자스는 연방군에 적극 참여하여 인구 대비 가장 높은 사상자를 기록했다.

캔자스-네브래스카법과 피의 캔자스 사태는 휘그당의 몰락과 공화당의 부상을 가져왔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에도 캔자스 사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회적 변화

캔자스의 경험은 인민주권원칙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민주적 절차도 극단적 이념 대립 상황에서는 폭력과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이는 미국 사회가 노예제라는 근본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명확히 했다.

또한 이 시기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조직적 이주와 폭력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 주는 사례가 되었다. 존 브라운의 행동은 후에 그를 순교자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정치적 극단주의의 위험성도 경고했다.

   국제적 영향

캔자스 사태는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유럽 언론들은 자유의 나라라던 미국에서 벌어지는 유혈사태를 비판적으로 보도했고, 이는 미국의 도덕적 권위에 타격을 주었다. 특히 영국은 이를 통해 미국의 노예제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재인식하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에 던지는 질문들

캔자스의 1861년 연방 가입은 164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현재 미국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과 직결되어 있다.

민주주의의 한계와 가능성 측면에서 볼 때, 캔자스 사태는 민주적 절차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 가치 충돌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2025년 현재 미국의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와 이념 갈등 상황에서 캔자스의 교훈은 더욱 절실하다. 낙태권, 총기 규제, 이민 정책 등 첨예한 사안들을 둘러싼 갈등이 때로는 폭력으로 번지는 현실을 보면서, 대화와 타협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연방과 주 정부의 권한 분쟁 문제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캔자스-네브래스카법이 제기한 연방주의의 복잡성은 오늘날 의료, 교육, 환경 정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각 주의 자율성과 연방 정부의 통합성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의 의미다. 캔자스 주민들이 피로써 지켜 낸 자유와 평등은 현재 세대에게도 계속해서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인종, 성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등 다양한 형태의 불평등에 맞서는 오늘날의 노력은 160여 년 전 캔자스 들판에서 시작된 자유와 평등을 향한 투쟁의 연장선상에 있다.

캔자스주의 연방 가입은 결국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가치 위에 서 있는지, 그리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자유와 평등의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그 결과로 얻은 교훈은 지금도 우리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의 참된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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